독서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 - 채사장 - (굴비킴)

굴비킴 2024. 8. 4. 12:36

 

이번에 읽은 책은 지적인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0이다.
이 책은  지대넓얕 시리즈중 3번째로 나온 책이지만 우주의 탄생부터 138억년의 시간, 즉 시리즈 1,2보다 앞의 시간을 다루는 이야기로 , 지대넓얕3이아닌 0(제로)으로 이름지었다고 한다. 

나는 지대넓얕 시리즈 1,2 그리고 마지막시르즈 0,  3권을 모두 읽었다. 1,2권이 실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다룬다면 시리즈 0은 나의 삶에서 진짜 필요한 지식 그리고 지혜를 다룬다. 

책을 읽는 동안 한번도 내가 생각해 보지 못한 우주의 탄생,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 그리고 일원론,이원론에 대한 것들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나는 무엇이고 , 세상은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리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나의 실체'에 대해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지대넓얕0를 통해 진짜 '나' 그리고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어떤 개념에 그리고 나의 내면의 목소리에 대해 느끼고 생각 할 수 있었고 이는 앞으로도 남은 나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한다.

지대넓얕0은 책 내용이 방대하여 프로필로그 및 에필로그에서 일부 문구만 포스팅할 예정이다. 
나에겐 책의 난도가 높은 편이라 쉽게 읽은 책은 아니지만 시간이 되면 정말 꼭 한번 읽어봤으면 하는 인생 책이다. 

프롤로그

 

파잔은 코끼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의식이다. 야생에서 잡은 아기 코끼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둔 뒤 저항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몇 날을 굶기고 구타하는 의식, 절반의 코끼리가 이를 견디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지만, 강인한 코끼리는 살아남아 관광객을 등에 태우고 돈벌이의 수단이 된다. 코끼리는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없을 테지만, 그들의 영혼은 산산이 부서지고 본능의 심연에서 어렴풋하게 냉혹한 세계를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 엄마를 찾아선 안 된다는 것과, 몽둥이의 고통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코끼리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은 단순한다.
자유를 향한 자기 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하고, 세상이 혼란스럽지 않은 척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악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파잔 의식을 시행하는 몽둥이를든 가난한 자들에게 분노하게 된다.
하지만 분노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모든 문제가 그러하듯 이것이 단순히 선악의 문제를 넘어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파잔 의식을 시행하는 자들도 피해자일지 모른다. 그들의 영혼도 이미 산산이 부서진 것일지도 말이다. 그들이 처음 아기 코끼리를 구타하는 것을 주저할 때, 그의 가정과 사회는 그에게 친절하게 말했을 것이다. 질문을 멈추라. 그것은 먹고 사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네가 지켜야 할 사랑하는 이들의 생존을 위해 어른스럽게 행동해라. 결국 그는 자기 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 했을 것이고, 세상이 혼란스럽지 않은척 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당신의 이야기다. 당신은 어느 곳에서든 매 맞는 코끼리 였고, 다른 곳에서는 몽둥이를 든 자였다.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내가 피해자였는지 가해자였는지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이미 파괴된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기원전의 머나먼 과거를 살아가던 고대의 인류도 오늘날의 현대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우리만큼이나 세상이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문명이 발생하고 도시가 건설됨에 따라 사람들은 자연의 질서에서 벗어나 사회라는 상징적 질서로 이주했다.

사람들 간의 물리적 거리는 가까워 졌고 재화는 부족했으며 이에 따른 갈등과 대립은 심화되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몽둥이를 든 자였고, 동시에 매 맞는 코끼리 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혼돈 속에서 현명한 자가 나타 났다. 그는 길을 헤매는 이들을 멈춰 세웠고, 자기 자신을 때리던 몽둥이를 내려놓게 했다. 사람들을 가르쳐 인간을 인간답게 했으며, 그들로 하여금 자기 안에서 빛나는 질문들을 다시 꺼내들게 했다.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스승이라 불렀다. 

21세게 첨단을 살아가는 현대인이 오래된 고전을 펼쳐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위대한 스승을 만나기 위해, 그들의 지혜를 참고함으로써 오늘 내 안의 혼란을 멈추기 위해, 빛나는 고전을 남긴 위대한 스승들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태어났음에도 공통적으로 우리가 다시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함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잊고 있던 빛나는 질문들과 대면하게 했다. 나는 무엇인가, 세계란 무엇인가, 이 둘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부터 위대한 스승들을 만나볼 것이다. 그
들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그것이 오늘날 나에게 어떤 길을 제시하는지 생각해 볼 것이다. 그럴 때, 가려져 있던 오솔길이 드러나고 우리는 내 안의 아기 코끼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에필로그 

 

이 책이 다룬 것

이 책의 주제와 결로은 명확하다. 주제는 위대한 스승들의 거대 사상이고, 결론 세계와 자아의 합일이다. 
이 거대한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게 우리는 7개의 대륙을 가로질렀다. 

우선 1장과 2장에서 세계의 실체에 대해 살펴 보았다.
다중 우주의 가능성과 우리 우주의 시작, 지구와 인류의 탄생, 문명의 발생을 시간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빠르게 여행했다. 
우리가 멈춘 시간은 기원전 5세기 무렵이었다. 
여기서 우리의 여행은 공간적으로 확장되었다. 지구 곳곳의 여러 문명에 등장한 위대한 스승들을 만나보며 그들이 자아와 세계에 대해 탐구한 결과물을 살펴보았다.

3장부터 5장까지는 인도와 동양의 스승을 만났다. 베다를 간직했던 고대 인도인과, 동아시아의 노자와 공자, 그리고 인도와동양의 연결고리가 된 붓다와 그의 분파들을 만나 보았다. 
이들은 세속과 삶속의 균형을 이루며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할 것을 제안했다. 

그 깊고 고독한 심연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 것은 나의 투명한 의식이자 동시에 우주 전체의 본질이었다. 
나의 눈앞에 드러난 세계의 실체는 나의 마음이고, 나의 마음속에서 세계의 실체는 열린다. 이러한 자아와 세계의 통합이라는 거대한 신비를 위대한 스승들은 꿰뜷어 보았고, 이를 범아일여, 도와 덕, 일체유심조로 언어화했다. 

6장과 장에서는 서양의 위대한 스승들을 만났다. 서양 사상의 양대 산맥인 철학과 기독교를 알아보며, 서양 사상이 동양의 일원론과는 달리 이원론으로 시작되었음을 확인했다. 우선 철학은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에 의해 이데아 사상이 제시된 이후로 2천 년 가까이 이원론 척할을 이어갔다. 기독교는 사도 바울에 의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추상화 되었고, 여기에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의 사상을 직접 적용함으로써 신과 인간, 천국과 지상이라는 엄격한 이원론의 세계관을 정립했다. 다만 철학에서는 칸트 관념론이 등장하고 기독교에서는 마이스터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가 등장하며 서양 사상 안에서도 일원론의 가능성이 진지하게 탐구 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왜인가?  21세기 기술문명의 최전선에서 우리는 왜 이토록 오래된 고대의 지혜를 들춰보아야만 하는가? 우리는 왜 일원론의 세계관을 알아야만 하는가?
우선 실용적인 이유부터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신이 고전을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잡고 동서양의 고전을 펼친다해도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은 원래 고전이 어렵기 때문도 아니고, 학창 시절에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며, 철학과 인문학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다. 실제 이유는 우리가 반쪽의 세계밖에 모른다는 데 있다. 
인류의 사유를 출발시킨 위대한 스승들은 일원론을 말해왔는데, 우리는 이원론의 세계에서 태어나 그 밖으로는 한걸음도 나가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외국을 여행하며 이것저것 경험해보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들이면서도, 자기 내면의 가려진 영억으로 나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원론이라는 비좁은 섬 안에 머물고 있지만 인류의 위대한 고전들은 대부분 일원론의 거대한 대륙 위에서 탄생했다. 당신이 고전을 펼치고 그 안을 자유롭게 여행하며 내면 세계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는 일원론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이것이 당신이 일원론을 이해해야하는 실용적인 이유다. 

다음으로는 당신 인생에 대한 존재론적인 이유를 들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세계관이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슬픈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수감자라는 것을 모르는 수감자와 도 같기 떄문이다. 어떤 면에서 세계관은 감옥이다. 감옥안에 있는 자에게는 감옥 밖의 한 줌의 공간도 결코 허락되지 않는다. 세계관도 마찬가지다. 세계관은 당신 내면의 감옥이다. 우리는 누구나 특정 세계관안에서 탄생하고 성장하며 죽는다. 그 바깥으로는 나가지 않고, 심지어 그 바깥이 있는지 조차 상상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태어나서 기독교인으로 성장하고 기독교 인으로 죽는다. 그는 한 번도 불교의 세계관에, 이슬람의 세계관에, 유물론의 세계관에 발을 디뎌보지 않고 자신의 세계가 전부라고 믿으며 눈을 감는다.

세상 모든 이가 각자 발 딛고 있는 수많은 세계관을 가장 근원적인 기준으로 나눈 것이 일원론과 이원론이다. 
어떤 이들은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보고, 세계가 자기 내면의 반영임을 매 순간 느끼며 성장하다가 죽는다. 그리고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은 이원론의 세계관 위에 서 있다.  우리는 여기서 태어나, 여기서 죽을 것이다. 그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심지어 그 바깥이 있는지 생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갖가지 느낌과 상념이 사실은 우리가 이원론의 세계관 위에 발 딛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갖게 된 것들 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눈앞의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는 것도, 그래서 마음이나 정신은 소홀히 하고 눈앞의 물질 세계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도, 세계와 자아를 독립된 실체로 느끼며 자신이 소멸한 이후에도 세계가 존속할 것이라고 믿는 것도, 그러니 나의 인생이라는 것은 덧없고 허무하다고 느끼는 것도, 나의 내면은 보이지 않으니 그 안을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타인의 말에 휘둘리게 되는 것도 모두 우리가 자아와  세계를 나누는 이원론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갖게된 사유의 흔적 들이다. 

우리가 이원론을 넘어 일원론의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 한 발을 내디뎌 익숙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로 들어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잃어버린 절반의 세계인 일원론의 세계, 그곳의 주인이 원래 당신이기 때문이고, 당신이 들어서기 전까지 그곳은 깊은 어둠 속에 버려져 있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외부의 폭풍을 가라앉히고 내가 가진 모든 선입견을 판단중지 한 후, 내면의 가려진 대륙을 향해 발을 내디뎌 보자. 고대의 위대한 스승들이 그 깊은 곳에 출구가 있다고, 그 출구는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해주고 있으니.

무엇을 할 것인가?

당신은 광활한 바다 앞에 섰고 사방은 열려 있기에 정해진 길을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나아가는 모든 방향이 길이 될 것이다. 다만 바다 수영을 하기 위해서 굳은 몸도 풀어주고 가득찬 배 속도 비워줘야 하기에 거대 사상의 바다로 나아갈 당신을 위해 준비운동을 준비 했다. 이준비 운동은 당신을 멈춰 세우는 것에서 시작한다.

첫째, 세상의 목소리를 의심해야 한다. 가족,학교,사회, 국가, 종교, 미디어가 모두 당신을 위한 것이라며 당신을 주저 앉히려 할 때 당당히 아니요 라고 말하고 그것에 마음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둘째,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당신의 하루 중에서 버려지고 흩어져 있는 시간을 모아 남는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TV를 끄고, SNS를 닫고, 당신이 당신의 방을 청소하듯 당신의 모든 시간을 분주하게 만드는 떠들썩한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당신의 시간을 만들어야 한다. 

셋째, 이제 남은 시간을 이용해 내면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눈과 귀를 닫고, 호흡을 가다듬고, 평온히 내면에 머물며, 끝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잡다한 생각이 잠잠해질 떄까지 여유롭게 기다려야 한다.

넷째, 마음이 가라앉았다면, 깊은 정적 속에서 자기 자신과도 대화하지 않는 침묵의 순간을 경험해야 한다. 그 속에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지 말고, 불안해 하지도 말고, 편안하게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다섯째, 많은 날이 지나고 충분한 시간이 흘러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익숙해졌다면, 그것이 당신의 즐거움이 되었다면, 이제는 현실로 나아가야 한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생각을 경청하고, 말을 줄이고, 그안에서 배우고 너그러워 져야 한다. 

여섯째, 게획을 세워야 한다. 몸도 마음도 평온한 어느 날에, 책상 앞에 앉아 자신의 삶이 다하게 될 날을 헤어려보고 남은 삶 전체의 거시적인 게획을 세워야 한다. 고대의 인도인처럼, 삶의 시간 중 언제 자아를 찾는 시간을 가질 것인지, 언제 내면을 향한 여행을 시작할 것인지, 팽개쳐 두었던 나의 삶을 다시 펼치고 먼지를 떨어내고 다림질해야 한다. 

일곱째, 천천히 나아가야 한다. 당신이 계획한 꺠달음을 향해 열린 길을 따라 향해해야 한다. 곁의 사랑하는 이들의 손을 잡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진중하게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세계가 나의 마음이라는 말의 실제 의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