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 #1 final (굴비킴)

굴비킴 2024. 6. 27. 13:40

 

죽음의 수용소에서 책을 읽고 아주 오랜만에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생활했던 빅터 프랭클 박사님의 이야기는 지금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누리면서 살고 있는지 다시한번 상기 시켜주었다. 

 

이런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당시 억울하게 그리고 너무 비참하게 운명하신 많은 분들의 명복을 빈다. 

 

이 책의 요약은  빅터 프랭클 박사님의 수용소에서의 생활 그리고 참혹한 환경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저자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 하였다. 

 

책을 읽고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모든 감사한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봤으면 한다. 

 

시간이 지나면 또 다시 모든 감사한 것들이 당연한 것들로 변해가겠지만 책을 읽는 시간동안 내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북리뷰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으려면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삶에 목적이 있다면 시련과 죽음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다. 각자가 스스로 찾아야 하며, 그 해답이 요구하는 책임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만약 그것을 찾아낸다면 그 사람은 어떤 모욕적인 상황에서도 계속 성숙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플랭클 박사는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추천의 글 중…

1.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 

1) 일정한 수의 수감자를 다른 수용소로 이동시킨다는 공식 발표가 났을 경우를 살펴보자. 그러면 사람들은 최종 목적지가 가스실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감자 중 병에 걸렸거나 쇠약해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뽑아 가스실과 화장터가 있는 큰 수용소로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대상자를 가리는 과정이 곧 수감자 사이에 혹은 수감자 집단 사이에서 벌어지는 무차별적인 싸움의 도화선이 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희생자 명단에서 자기 이름이나 친구 이름을 지우는 것이다. 한 사람을 구하려면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2)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첫날 밤에 우리는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침상에서잠을 잤다. 각 층마다 무려 9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함께 잤다. 9명에게 배당된 담요는 단 두장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옆으로 누울 수 밖에 없었고, 서로 몸을 꼭 붙인채 비비면서 잠을 자야 했다. 날이 혹독하게 추웠기 때문에 이런식으로 자는 것이 어느정도 도움이 되기는 했다.  

3) 한 사람이 숨을 거두자 나머지 사람들이 아직 체온이 남아 있는 시신 곁으로 다가갔다. 그중 한 사람이 죽은 사람이 먹다 남긴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감자를 낚아채 갔다. 그다음 사람은 시신을 신고 있는 나무 신발이 자기 것보다 좋다고 생각했는지 신발을 바꾸어 갔다. 세 번째 사람도 앞사람이 했던 것과 똑같이 죽은 사람의 외투를 가지고 갔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진짜 구두끈을 갖게 됐다고 좋아했다.  

4) 수용소에서 갇힌 사람들이 가장 자주 꾸는 꿈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빵과 케이크, 담배 그리고 따뜻한 물로하는 목욕이었다. 

5) 수용소 생활의 스물네 시간 중 가장 끔찍한 시간은 바로 기상 시간이었다. 아직 밖이 깜깜할 때 날카롭게 울리는 세 번의 호루라기 소리가 잠이 부족한 우리 몸을 달콤한 꿈에서 깨우곤 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부종으로 부어오른 아픈 발을 젖은 구두 안에 쑤셔 넣으려고 한바탕 씨름했다. 그럴 때면 으레 신발을 끈으로 쓰던 철사가 끊어지는 것 같은 사소한 문제가 발생 했으며, 그 때문에 여기저기서 끙끙 대거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6)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7) 탈옥을 결심하고 친한 친구에게 했던 말이다 
잘 듣게 오토, 만약 내가 집에 있는 아내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리고 자네가 아내를 다시 만내게 된다면 그녀에게 이렇게 전해 주게, 내가 매일같이 매시간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잘 기억하게. 두 번째로 내가 어느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 세 번째로 내가 그녀와 함께했던 그 짧은 결혼 생활이 이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는 여기서 겪었던 그 모든 일보다 나에게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전해주게" 

8)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인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 할 수 있다. 강제 수용소에서 있었던 우리들은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은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9) 강제 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가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놓았던 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 

10)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 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11) 나는 누군가가 친구나 아내, 산 사람, 혹은 죽은 사람, 혹은 하느님, 각각 다른 시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했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그 사람은 우리가 자기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의연하고 비굴하지 않게 시련을 이겨내고, 어떤 태도록 죽어야 하는지 알기를 바란다고.